길이야기/영혼이 전해주는 이야기-자성의 집

그리스도의식의 깨어남

aossaz 2009. 7. 7. 15:13

샴브라에 올려진 로드란느란 분의 글입니다.

 

요체는 스승님께서 말씀하신...."맞고 할끼여..그냥 할끼여"..입니다

 

그냥 하세요..............네?...........ㅎㅎㅎㅎㅎㅎㅎㅎㅎ

 

새로운 집..................^^

 

 

마음과 의식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예로 들어,

아, 내가 그동안 나쁘게 살아왔구나. 착하게 살아야지.

이런게 마음의 작용이지요.

감동받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면

행복해 하기도 합니다.

쿳후미 말대로 섹시하기 조차 한 것 같습니다만...

 

여튼 우리가 배우는 영적개념은 이 마음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마음을 먹자, 저런 마음을 먹자... 이런게 아니란 거지요.

 

샴브라는 그리스도 의식의 깨어남을 함께 하는 가족입니다.

그리스도 의식이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의식입니다.

마음은,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필터를 통해 입맛에 맞는 것만 받아 들이지요.

그리고, '전체'는 더더욱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안됩니다. 과부하가 걸려 터쳐 버릴지도 모르죠.

 

새로운 집이란 이 그리스도 의식의 상징입니다.

일상에서 이 그리스도 의식에 깨어 있을 수 있다면...

이런 저런 영적개념은 이제 필요없어 지겠지요.

 

여튼,

초점이 이 그리스도 의식에 있기에

우리는 '허용' 혹은 '수용'이란 개념을 깊이 있게 다루어 왔습니다.

인간자아 받아 들이기나... 지금에 존재하기나...

그 모든 가르침의 방향은 이 그리스도 의식을 가리키고 있다고 봐도

되겠죠.

 

'총체적 수용' 이나... '총체적 허용'에 자꾸 의식을 두다 보면

그리스도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습니다.

 

다만,

그리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느냐? 예쁜 애인도 생기느냐?

등등의 욕구, 아젠다로 그 성취를 비교하려 하지만 않는다면요.

 

음...

또 이것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중 하나는....

'나쁜 체험'은 받아 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일 겁니다.

 

예를 들면, 지금 현재 기분이 나쁘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그 기분을 풀기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그냥 '기분 나쁨'이란 체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려 하지 않지요.

그냥 그 체험을 받아들여보면... 무엇이 환상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또 하나

지금 담배를 무지무지 피고 싶다. 그런 상태에 있다고 해 봅시다.

마음은 담배를 피워야 하나? 아니면 참아야 하나...

이런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리스도 의식은 '담배피고 싶은 욕구의 상태'를 그냥 있는 그대로

체험합니다. 받아 들입니다.

그 다음 순간 담배를 피던 말던 상관이 없지요.

마음은 그 욕구의 상태를 견디지 못하기에,

해소하기 위해 뭔가 '해답'을 갈구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굉장히 짜증나고 싫다. 보기도 싫다.

정말로 꺼려하는 것은 '짜증나는 기분'을 체험하고 싶지 않다.

라는 거지요.

만약 이 짜증나는 기분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그 상대방도 함께 좋아하고 사랑하겠죠.

보통 관계에 있어 이 웬수! 하면서도 함께 지내는 경우,

마음과는 달리 내면의 의식은 그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이 짜증나는 기분을 체험하고 싶지 않기에,

즉각 '분노'를 통해 발산하거나... 하는 드라마로 이어집니다.

그 드라마 속에서 뭔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고 에너지가 해방되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운바가 있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전부 이원성 속에서의 해법들이지요.

새로운 해법은 '수용'의 그리스도 의식에서 나옵니다.

 

수용은 그냥 그렇게 하면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존재상태에 있던 그것에 저항하지 말고 걍 받아 들이는 거지요.

대신 깨어 있으세요.

아니면 생각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머리-생각속에 살아온 것은 꽤 오래된 습관인지라...

그리스도 의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제법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수용에 대한 오해가 또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이나 괴로움도 받아 들여서

그걸 계속 참기만 하란 것인가?

이것도 마음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정말로 받아 들이게 되면,

고통이나 괴로움이란 에너지는 그저 환상이었음을 체험으로 알게 됩니다.

달리 말해 고통과 지복은, 저항하느냐 받아 들이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창조주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창조물을 받아 들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 보고 듣고 느껴지는 그 모든 것이 나(진아)의 창조물입니다.

이원성 속에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 힘들었습니다만...

그리스도 의식으로 대표되는 이 새로운 에너지 속에서는,

이 총체적 수용이 가능해 졌습니다.

수용없이 어떻게 창조주의 자격이 있겠습니까.

 

이제 양자적 도약이 일어난 이후,

각자 내면에서 그리스토 의식이 강렬히 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그리스도 의식-아기 이자...

그 의식을 양육하고 보살펴야 하는 부모 이기도 합니다.

 

씨앗은 깨어나고... 천둥번개가 칩니다.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무엇이 그리스도 의식의 작용인지 민감하게 깨어 있으십시오.

이것은 개념속의 일이 아니라,

실재 삶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